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취임 첫해에 발생한 9.11 테러는 미국과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당시 미국 사회와 국제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되짚어 봅니다.
조지 W. 부시의 취임

21세기의 문을 연 2001년, 미국은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와 닷컴 버블 붕괴의 불안감이 공존하는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새 대통령을 맞이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의 8년이 막을 내리고, 공화당의 조지 W. 부시가 제43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취임은 축제와 환호보다는 깊은 정치적 분열과 논란의 그림자를 안고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논쟁적인 대통령 선거 중 하나로 기록된 2000년 선거의 직접적인 결과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2000년 대선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와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맞붙은 세기의 대결이었습니다. 선거 결과, 두 후보는 선거인단 확보에서 초박빙의 승부를 펼쳤습니다. 승패의 향방은 단 한 곳, 바로 플로리다 주의 개표 결과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플로리다의 개표 과정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수작업 재검표, 천공식 투표용지의 ‘매달린 채드(Hanging Chad)’ 논란, 끊임없는 소송전이 이어지며 미국 전체가 한 달 넘게 차기 대통령을 확정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습니다.
결국 이 기나긴 분쟁은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막을 내렸습니다. 연방대법원은 5대 4라는 근소한 차이로 플로리다 주의 재검표를 중단시키라는 판결을 내렸고, 이로써 조지 W. 부시가 플로리다 주의 선거인단을 모두 차지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앨 고어 부통령이 전국 총 득표수에서는 54만 표 이상 앞섰다는 사실 때문에, 이 선거는 미국 민주주의의 정당성에 대한 깊은 상처와 의문을 남겼습니다. 부시는 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분열된 여론을 안고 백악관에 입성해야만 했습니다.
분열 속에서 통합을 외치다
2001년 1월 20일, 조지 W. 부시는 워싱턴 D.C.에서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취임식장 주변에서는 선거 결과에 항의하는 시위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는 취임 연설을 통해 분열된 국가를 하나로 묶기 위한 메시지를 던지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는 “공손함, 용기, 연민, 품성”과 같은 가치를 강조하며,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들에게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취임 초기 국정 운영 방향과 그가 마주한 시대적 과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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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초유의 선거 분쟁과 그 결과
2000년 대선은 플로리다 주에서 단 537표 차이로 승부가 갈렸으며, 이는 연방대법원의 개입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미국 사회에 깊은 정치적 불신과 분열을 남겼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임기 시작부터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절반의 국민을 설득하고 통합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선거 과정에서 훼손된 리더십의 정당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
‘온정적 보수주의’와 통합의 메시지
부시 대통령은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를 자신의 정치 철학으로 내세웠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보수주의 가치인 작은 정부, 감세, 자유 시장 원칙에 더해,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포용하는 개념입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나는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며, 정치적 이념을 넘어선 국민적 통합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했습니다. -
초기 국정 운영과 정책 방향
취임 초기, 부시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국내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대규모 감세안(일명 ‘부시 감세’)을 추진하여 경제 성장을 도모했고, ‘낙오 아동 방지법(No Child Left Behind Act)’을 통해 공교육 개혁에 힘썼습니다. 이처럼 그의 초기 정책들은 경제와 교육 등 미국 내부의 현안 해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의 첫 8개월은 외교나 국방보다는 국내 정치의 안정과 민생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습니다.
이처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임기는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고 국내 문제에 집중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맑고 청명했던 그날 아침의 끔찍한 사건이 부시 대통령의 리더십은 물론, 미국과 전 세계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의 임기는 곧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비극의 날, 9.11 테러

2001년 9월 11일, 그날의 하늘은 유난히 맑고 푸르렀습니다. 뉴욕 시민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활기찬 아침을 맞이했고, 워싱턴 D.C.의 관료들은 분주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평범했던 화요일 아침은 곧 역사상 가장 끔찍한 테러 공격으로 얼룩지며 전 세계를 충격과 슬픔에 빠뜨렸습니다. 알카에다 소속 테러리스트 19명이 납치한 4대의 민항기가 미국의 심장부를 겨냥하면서, 이날은 21세기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분기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단순한 공격을 넘어, 현대 사회의 안보 개념을 뿌리부터 뒤흔들었습니다. 초강대국 미국의 본토가 무방비 상태로 공격당했다는 사실은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지금부터 그날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자세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끔찍했던 102분의 기록
첫 번째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WTC) 북쪽 타워에 충돌한 오전 8시 46분부터 남쪽 타워가 붕괴한 오전 10시 28분까지, 약 102분 동안 미국은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겪어야 했습니다. 각 비행기의 충돌과 그 여파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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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충돌 (오전 8:46)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에서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던 아메리칸 항공 11편(AA11)이 납치되어 뉴욕 맨해튼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의 93층과 99층 사이에 충돌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 사고로 여겨졌으나, 이 충돌은 곧 시작될 거대한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충돌과 동시에 엄청난 화염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고, 건물 상층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탈출로는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
두 번째 충돌 (오전 9:03)
첫 충돌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역시 보스턴에서 출발한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UA175)이 세계무역센터 남쪽 타워의 77층과 85층 사이로 돌진했습니다. 이 장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단순 사고가 아닌 명백한 테러 공격임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충돌은 뉴욕 시민들과 전 세계인들에게 극심한 공포와 혼란을 안겨주었습니다. -
세 번째 충돌 (오전 9:37)
테러리스트들의 목표는 뉴욕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을 이륙한 아메리칸 항공 77편(AA77)이 워싱턴 D.C.에 위치한 미 국방부 건물, 펜타곤의 서쪽 면에 충돌했습니다. 미국의 군사 지휘 본부가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이 사건은 국가 안보 시스템의 심각한 허점을 드러내며 미국 사회 전체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
네 번째 비행기의 추락 (오전 10:03)
뉴어크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유나이티드 항공 93편(UA93) 또한 납치되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워싱턴 D.C.의 백악관이나 국회의사당을 노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기내 승객들은 전화 통화를 통해 이미 다른 곳에서 테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테러리스트들에게 저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승객과 승무원들의 용감한 저항으로 비행기는 목표물에 도달하지 못하고 펜실베이니아주 생크스빌 인근 들판에 추락했습니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더 큰 참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무너진 자부심과 남겨진 상처
테러의 여파는 참혹했습니다. 오전 9시 59분, 화재로 인한 고열을 이기지 못한 남쪽 타워가 먼저 붕괴했고, 29분 뒤인 오전 10시 28분에는 북쪽 타워마저 주저앉았습니다. 한때 뉴욕의 상징이자 미국의 번영을 대표했던 쌍둥이 빌딩이 먼지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전 세계에 깊은 절망감을 안겼습니다.
이 비극으로 인해 항공기 탑승객, 건물 근무자, 그리고 구조 작업을 위해 현장에 뛰어든 소방관과 경찰관 등 총 2,977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특히 희생자 중에는 343명의 소방관과 72명의 경찰관이 포함되어 있어, 자신을 돌보지 않고 타인을 구하려 했던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이 공격은 미국 본토에서 발생한 외국 세력의 공격 중 가장 치명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피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테러 현장에서 발생한 유독성 분진과 잔해로 인해 수많은 구조대원과 생존자들이 암, 호흡기 질환 등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되면서 희생자의 수는 지금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9.11 테러는 단순한 건물의 붕괴가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삶과 미국의 자부심을 함께 무너뜨린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테러와의 전쟁’ 선포

2001년 9월 11일, 미국 본토를 겨냥한 사상 초유의 테러는 미국인들은 물론 전 세계를 충격과 슬픔에 빠뜨렸습니다. 연기로 뒤덮인 뉴욕 맨해튼의 하늘과 무너져 내리는 세계무역센터의 모습은 하나의 상징이 되어 21세기의 서막을 비극적으로 알렸습니다. 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분노 속에서,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단호한 결단을 내립니다. 그것은 바로 ‘테러’라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면전, 즉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건 발생 불과 9일 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월 20일, 미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을 통해 ‘테러와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며 21세기 세계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연설은 단순한 선언을 넘어, 이후 미국의 외교 및 안보 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새로운 원칙을 제시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선포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어떤 즉각적인 변화를 가져왔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역사적인 선언의 주요 내용
부시 대통령의 연설은 비통에 잠긴 미국 국민을 위로하는 동시에, 테러 세력을 향한 명확하고 강력한 경고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선언은 크게 세 가지 핵심적인 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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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에다와 그 비호 세력에 대한 최후통첩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의 배후로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테러 조직 ‘알카에다’를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알카에다에 은신처를 제공하던 탈레반 정권을 향해 “모든 테러리스트를 즉각 미국에 넘기고, 모든 테러 훈련 캠프를 폐쇄하라”는 최후통첩을 날렸습니다. 이는 특정 국가가 아닌, 테러 조직과 그들을 지원하는 세력 모두를 공격 대상으로 삼겠다는 새로운 전쟁의 개념을 제시한 것입니다. -
‘부시 독트린’의 등장: “우리 편이 아니면 적”
연설에서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대목은 “모든 국가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테러리스트의 편에 설 것인가(Either you are with us, or you are with the terrorists)”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이는 ‘부시 독트린’의 핵심으로, 테러리즘에 대한 중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이 원칙은 이후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 되었으며, 전 세계 국가들을 미국의 대테러 정책에 동참하도록 압박하는 강력한 외교적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
미국 본토 방어를 위한 대대적인 조직 개편
‘테러와의 전쟁’은 단순히 해외의 적을 향한 군사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미국 본토에서 또 다른 테러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례 없는 조치들을 단행했습니다. 테러 용의자에 대한 감시와 정보 수집 권한을 대폭 강화한 ‘애국법(Patriot Act)’이 제정되었고, 22개의 연방 기관을 통합하여 거대한 규모의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가 신설되었습니다. 이는 9.11 테러가 미국의 안보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였습니다.
선포 이후의 세계
‘테러와의 전쟁’ 선포는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탈레반이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미국은 2001년 10월 7일, 영국 등 동맹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을 개시했습니다. 이는 20년에 걸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또한 이 선언은 전 세계의 공항 검색대를 강화하고, 금융 거래 추적을 정교화하는 등 국제 사회의 안보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한편으로는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 침해라는 비판을 동시에 낳으며 기나긴 논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명확한 종전 선언 없이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국제 정세와 각국의 안보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2001년 이후의 세계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심장부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는 21세기의 서막을 알리는 비극적인 신호탄이었습니다.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이는 단순한 테러 공격의 기록을 넘어 21세기 세계사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꾼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우리 일상에까지 깊고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9.11 이후, 세계는 이전과 결코 같을 수 없었습니다. ‘테러’라는 단어는 일상적인 위협이 되었고, ‘안전’의 개념은 근본부터 재정의되었습니다.
9.11이 남긴 유산과 변화의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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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와의 전쟁’ 선포와 국제 질서의 재편
9.11 테러 직후,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을 선포했습니다. 이는 특정 국가가 아닌 ‘테러리즘’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상대로 한 무기한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미국은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알카에다와 그들을 비호하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2001)했고, 뒤이어 대량살상무기(WMD) 보유를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2003)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맹국들에게 ‘우리 편에 서거나, 테러리스트의 편에 서거나’ 양자택일을 강요하며 국제 사회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했습니다. 이 전쟁은 20년 이상 지속되며 엄청난 인명 피해와 천문학적인 재정적 손실을 낳았고, 중동 지역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켜 IS(이슬람 국가)와 같은 새로운 극단주의 무장 단체가 발호하는 비극적인 토양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
강화된 보안 검색과 프라이버시의 후퇴
9.11 테러는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공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액체류 반입 제한, 신발과 허리띠까지 풀어야 하는 검색대, 전신 스캐너의 등장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테러 용의자에 대한 정부의 감시 권한을 대폭 확대한 ‘애국법(Patriot Act)’이 통과되었고, 이는 전 세계적으로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한 개인정보 수집 및 감시 활동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각국 정부는 CCTV 설치를 확대하고, 통신 기록 및 인터넷 사용 내역을 추적하는 등 감시 시스템을 경쟁적으로 도입했습니다.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우리는 상당한 수준의 프라이버시를 포기해야 했으며, ‘빅브라더’의 감시가 일상화되는 사회로의 전환이 가속화되었습니다. -
이슬람 혐오(이슬람포비아)와 문화적 갈등의 심화
테러를 자행한 것은 알카에다라는 극단주의 조직이었지만, 이 사건은 전 세계 18억 인구의 종교인 이슬람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을 찍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슬람=테러’라는 위험한 등식이 확산되면서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차별, 증오 범죄가 급증했습니다. 히잡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받거나, 이슬람 사원이 훼손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유럽과 북미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었고, 이민자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과 국경 장벽 강화를 외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9.11은 국가 간의 물리적 전쟁뿐만 아니라, 문화와 종교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의 서막이기도 했습니다. -
금융 시스템의 변화와 테러 자금 차단
테러 조직의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한 국제적인 공조 역시 9.11 이후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각국은 자금세탁방지(AML) 및 테러자금조달방지(CFT) 규제를 대폭 강화했으며,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역할과 권한이 막강해졌습니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고객의 신원을 철저히 확인하고 의심스러운 거래를 의무적으로 보고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제 금융 거래는 이전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투명해졌으며, 테러리스트나 범죄 조직이 자금을 은닉하고 이동시키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지만, 한편으로는 금융 거래의 자유를 일부 제약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